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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작 지식인

바우하우스?

우리가 가끔 어디 가면.. 바우하우스 디자인.. 이라고 대충 줏어듣는거 있지..
뭔가 미니멀 하고 심플함의 극치...   간혹 바우하우스 라는 이름으로 원룸 지어 세 주는 놈도 있던데;;
도대체 바우하우스가 뭔 개 이름인가... 싶어서 검색해보니...   요런 깊은 뜻이 있네.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하였다.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려는 것이었다. 


바이마르에서 출발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폴 클레(Paul Klee),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초기에는 공예학교 성격을 띠다가 1923년에 이르러서야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성과를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로피우스와 이텐 사이에 대립이 생겨 이텐이 바우하우스를 떠난 뒤에는 모호이너지(Lszl Moholy-Nagy)가 후임으로 참가하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교육방침이 정착되어 바우하우스의 특색으로 자리잡았는데,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간 기초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그림·직물·인쇄의 각 공방으로 진급한다. 거기서 형태교사에게 조형 이념을 배우면서 공작교사에게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데사우기(期)로 부른다. 이 시기부터는 이미 종합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였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바이마르 시절의 졸업생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계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6년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校舍)로,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가 잘 나타난다. 그리고 19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도 기여한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민중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건축이 모든 의미의 미적 과정이라고 역설하였다.

19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 관계가 좋지 못하여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데사우를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1933년 나치스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망명 교사나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으며, 1955년에는 바우하우스 졸업생 막스 빌(Max Bill)이 다시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는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으로,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부임하고, 모호이너지가 시카고에 뉴바우하우스를 개설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즉 이들로 인해 미국 동부에서는 하버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중부에서는 일리노이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건축의 양대 산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위원회를 결성해 시카고의 건축가들을 일리노이공과대학으로 초빙, 시카고 철골 고층 건물의 신기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완전히 폐쇄되기는 했지만, 이 곳에서 제작한 제품들은 많은 곳에서 모방되었다. 또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설계하는 방법 역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교수법과 교육이념 역시 세계 곳곳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 포함될 만큼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발터 그로피우스

알마의 수기를 보면 그로피우스는 "모든 의미에서 아름다운 사람이며 천재적인 예술가이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면 어둡고 무겁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그로피우스는 한나 아렌트의 저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피우스가 뛰어난 건축가라는 사실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만약, 그의 인생이 르 코르뷔지에처럼 자유로운 것이었다면 보다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로피우스 자신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90% 이상이 외부 환경과의 전쟁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보다 1년 반정도 앞선 시기에 그로피우스에게 도착된 반 데 벨데의 1915년 4월 11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교장을 맡아주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나는 나 자신의 후계자로 귀하와 오브리스트와 엔델을 추천했습니다. 귀하는 내가 기대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 벨기에 사람이었던 데 벨데는 전쟁으로 인해서 적국의 국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독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바이마르에 부임한 그로피우스는 여러 경로를 거친 끝에 1919년 공예학교를 개조해서 바우하우스를 창설했다. 당시의 나이가 35세. '바우하우스' (건축의 집)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중세 고딕 시대의 직공 집단<바우휴테 - bauhuhe>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식해서였다.

바우하우스 창설 선언에서 그로피우스는 "우리는 수공예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조형의 원천이다."라고 말했다. 이곳에 ,<중세 공방>의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요소이다. 그는 생산과 교육, 두 기능을 접목한 중세 공방을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선언의 열기 속에는 1918~1919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특별한 정서 이념이 깃들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인연으로 교육 현장에 뛰어들게 된 그로피우스는 르네상스의 거장들처럼 '완전한 조형예술가'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디자인 법칙에 대해서 최신 이론교육을 받으면서 워크샵을 통해서 실제적인 제작을 익히고 손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로피우스는 독재형 리더가 아니었다. 건축가로서 그는 팀윅에 의한 설계시스템을 지향하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작업협동체(Arbeitsgemeinschaft) 이념을 제창했다. (그의 후임자 마이어는 이 방향을 보다 철저화 한다. 후에 무헤는 회상한다. "우리는 그로피우스의 이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켰다. 또한 우리들은 그와 함께 자신을 변화시켰다.

2.미스반데어로에 [ Mies van der Rohe, Ludwig , 1886.3.27~1969.8.17 ]
르 코르뷔지에, F.L.라이트와 더불어 20세기 건축계를 대표한다.

독일의 아헨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907년 주택을 처음 건축하였고, 1909년에 P.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경험을 쌓았다. 1912년에 설계한 크뢸러의 저택으로 뒷날 그의 주제가 된 고전주의적 건축형태를 추구하는 기본적 자세를 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표현주의적 경향의 ‘철과 유리의 마천루안(案)’, ‘철근 콘크리트조 사무소 건축안’ 등 초고층 건축안을 발표하여, 유리와 철강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국제합리주의 건축운동의 일환을 맡아, 1927년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이 되고, 1929년에는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의 독일관을 설계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0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폐쇄되었다.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이듬해 아머공과학원(뒷날의 일리노이 공과대학) 건축과 주임교수가 되었고, 1940년부터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배치 계획과 그 건축군의 설계, 프로몬토리 아파트(1949)와 판즈워스의 저택(1950) 등 시카고를 중심으로 정력적인 설계활동을 하였다.

수평 지붕으로 공간을 덮는 계열의 건축물로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크라운홀(1952)과 베를린 국립미술관(1968) 등이 있고, 철강과 유리의 초고층건축 계열로는 시카고의 레이크쇼어드라이브의 아파트(1951), 뉴욕의 시그램 빌딩(1958), 시카고의 연방센터(1964)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통적인 고전주의 미학과 근대 산업이 제공하는 소재를 교묘하게 통합한 그의 건축은 건축사상 한 시대를 여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준 운동은 :
미술공예운동 [ 美術工藝運動 , Arts and Crafts Movement ]
19세기 말 영국에서 W.모리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예개량운동.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빅토리아시대에 와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발전하였고, 공업생산과 기계생산에 의한 제품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모리스는 이러한 기계만능주의가 결국은 생활 속의 미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가구 ·집기 ·옷감 디자인 ·제본 ·인쇄 등 응용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려고 중세적 직인제도(職人制度)의 원리에 따른 공예개혁을 기도하였다.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하여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는 직인기술의 향상을 위한 몇 개의 조직도 결성되었는데, 1882년의 ‘센추리 길드’, 1884년의 ‘아트위키즈 길드’와 ‘아츠 앤드 크렙츠 전람협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직인적 공예운동은 기계능력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행한 듯하나, 예리한 문제점 제기와 세련된 미의식은 그 후의 공예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