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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쫓기는 나치 전범, 보호받는 친일파?

18일 AP 등 외신에 따르면 독일 철도역의 책임자로 일하다 은퇴한 아돌프 슈토름스(90)는 나치 패망 한 달 전인 1945년 3월28일 친위대 하사로 히틀러 유겐트(나치 청소년조직) 대원들과 함께 유대인 강제노역자 57명을 대량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슈토름스의 범죄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 학생인 안드레아스 포스터(28)에 의해 우연히 밝혀졌다. 포스터는 도이취 쉬첸 마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사건을 연구하던 중 핵심인물인 슈토름스를 발견하고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에서 관련 파일들을 입수, 범죄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이어 독일 뒤스부르그에 거주하던 슈토름스를 찾아내 지난 7월 독일 검찰에 그의 범죄사실을 알렸다. 검찰은 지난 17일 슈토름스를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2009년 11월 18일 http://news.nate.com/view/20091119n00856?tab=i11

내가 안그랬대니깐...

독일은 패전후 국가가 직접 나치만행을 참회, 사죄하고 배상함으로써, 승전국과 화해했으며 현재는 유럽통합의 주도국이 되었다. 

무려 60년전의 범죄 이지만.. 지금도 독일은 나치 전범들을 찾아내어 죄를 묻는데 한 치의 꺼리낌도 없다.
서독의 소도시 루드빅스버그는 나치 전범 체포센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는 산 나치전범을 모두 잡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늘도 소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도 20명의 나치전범을 수사하고 있다" 고 '나치전범연구소' - 라고 읽고 '나치사냥센터' 라고 이해한다. - 의 쿠르투 슈림 소장은 말한다.  

1958년 나치전범 색출 부설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독일내부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도피한 나치전범까지 잡아돠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임무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특수한 수사기관 처럼 이들은 독립적으로 수사하며, 나치가 숨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가 독일로 압송 재판에 회부한다.

지난 50년간 10만명이상의 나치전범을 재판에 넘겼고, 수없이 ‘사냥’했다. 유명한 나치재판 대부분이 이 연구소의 성과다. ‘사냥활동’은 나치독일의 범죄기록을 연구해 범죄유형을 분류하고 신원을 파악한 뒤 개시되었다. 나치독일은 범죄기록을 점령지역에 숨긴 사례가 많지만, 체코의 성에 숨겨둔 ‘나치친위대의 만행보고서’를 찾는등 이를 발견하는 업적도 많이 세웠다. 

이 연구소는 전직 판/검사 경찰관으로 구성되었는데. 어찌보면 나치 청산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인적구성인 셈이다. 

지난 1월18일 오후 경북 경산시 평산2동155-2 뒷산 대원골 폐광산 입구. 얼음굴로 알려진 이 곳 폐광산.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높이의 얕은 굴을 3m정도 지나자 폭과 깊이가 넓어진 동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이 일제시대 남한에서 코발트광산으로 유명했던 곳의 입구다. 40∼50cm 깊이의 물이 고인 깜깜한 굴속을 30∼40m 조심스레 들어가자 거짓말같이 평지가 나타나고 돌무더기가 보이기 시작, 돌무더기속에서 두개골, 골반뼈, 정강이뼈 등 피살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더기를 지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정강이 뼈 등 인골이 분명한 뼈를 간헐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갱내부가 완전히 막혔기 때문이다. 갱입구에서만 10여구의 유골을 찾아낸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유골이 폐광 깊은 곳에서 반세기동안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한국판 '킬링필드' http://twurl.nl/onsss6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 보도연맹으로 몰려 학살당하는 양민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자 하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한다. 보도연맹은 대한민국정부 절대지지, 북한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남로당, 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 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내용등 철저히 반공주의 강령으로 삼았었다.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 2만 명에 이르렀다. 보도연맹 대상자는 좌파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의 강제적이었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식량등이 배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상에 관계없이 식량 배급타기위해 등록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6 25 전쟁이 발발했을때 이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쳤고, 피난가는길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 이라는 의심을 가졌다. 보도연맹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나머지 각지역에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 3000명을 처형하는등, 곳곳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의 주체는 당시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 극우익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곧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좌파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와중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인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고,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과 유가족들은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6.25전쟁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 많게는 50~100여만명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전 대통령)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박정희 충성혈서를 다룬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11일자 사본

http://blog.naver.com/macsanjo/130072998909

청년 박정희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1939년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이사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11일자 사본을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과 반발로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친일청산> 이란 <나치청산>이나 <국민보도연맹 학살> 과도 같은 끔찍한 모습이었을 게다.


그러나 친일파, 너희들 대한민국 안에서 언제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까? 


2001년 대한민국에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요 과업으로 삼은 "민족문화연구소" 가 설립되었다.

2001년 12월, 개인 1850명과 185개 단체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이 출범했고, 당일 여러 분야의 120여 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재단 산하 특별 위원회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2004년 16대 국회에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5억원 전액을 삭감했고 (위원장 박종근). 곧이어 시작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모금(네티즌 대상) 을 행정자치부 (현 행정안전부) 는 법에 저촉된다며 모금운동 중단을 요구한다.

2005년과 2008년 두차례에 걸쳐 약 4,776명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을 발표했다.  곧이어 보수단체 등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적행위로 적시, 기자회견과 시위등을 통해 반대했고.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적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식이 열렸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가 오려면, 반드시 친일청산이 필요하다. <숙청> 이 아니라. <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