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북적대는 지하철. 운 좋게도 바로 앞 사람이 일어납니다.
반쯤 졸고 있었지만 빈 자리는 귀신같이 알아채 냉큼 앉습니다.
이제 조금 편하게 눈 붙이며 갈 수 있겠군, 하며 긴장을 늦추려는 찰라,
너무나 기분 좋은 향에 눈이 떠지며 정신까지 또렷해집니다.
누가 이리 좋은 향을…하며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랍니다.
바로 왼편에 앉아있던 아가씨에게서 나는 향이었는데,
외모하며 분위기하며 입이 멍하니 벌려질 정도로 기막힌 미인입니다.
크고 맑은 눈이 적당히 화려하지도 튀지도 않으면서
전반적으로 약간 귀여운 느낌까지 섞여있는 인상입니다.
가만 보니 바르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그 모습까지 정말 참하네요.
반쯤 눈 감고 사람들에 부대껴 졸고 있을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군요.
가슴이 크게 쿵쾅대며
어떻게 말이라도 걸어볼까, 어디서 내릴까, 이 시간에 항상 이 라인을 타는 걸까 등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옵니다.
어라. 그러고보니 유독 이 앞에만 시꺼먼 남정네들만 많은 것 같네요.
이 칸에서는 유독 이 부분만 붐비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아, 이런 짐승들 같으니, 하는 기사도 정신도 머리 속을 스쳐갑니다.
그 때였습니다.
“저기, 실례지만.”
그녀가 말합니다.
야, 목소리도 적당히 부드럽고 톤도 알맞은 것이,
세련된 아나운서 한 명이 앞에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라? 그런데, 방금 나한테 말한 것 같은데?
조심스레 눈을 돌려보니, 세상에 저를 보고 있네요!
“혹시, 메신저 하세요?”
헉! 이건 또 무슨 말이랍니까!
메신저라니요. 지금 그녀가 제게 메신저를 하냐고 물어본 거 맞죠?
무슨 뜻이지? 메신저를 하냐니. 지하철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이 무슨 뜬금없는. 앞뒤 없이.
그렇게 멍하니 입 벌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빠져있었습니다.
아, 그녀가 눈썹을 아주 살짝 튕겨주며 연한 미소를 띄워주네요.
저...정말이네? 내…내 메신저 주소? 내…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심장이 사정없이 뛰어댑니다. 쿵쾅대는 울림이 옆사람에게 들릴 것 같습니다.
반쯤 벌린 입에서 마른 침을 꼴깍하니, 삼킵니다.
아마 5초도 지나지 않았겠지만,
셀수 없는 수 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이 나를 몇번이고 휘몰아 감아쳤는지 모릅니다.
“아…아, 네, 네!!!”
허겁지겁 서류가방을 엽니다.
마땅히 메신저 주소를 적어줄 메모지가 없음을 떠올리고
진작에 멋진 다이어리와 만년필을 사둘 걸, 하는 후회가 머리 속을 스쳐갑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가까스로 보고서 표지 하단 빈 부분을
조심스레 접어 최대한 깔끔하게 찢어냅니다.
그리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웬 고기집 전화번호가 박혀있는
투명한 홍보용 볼펜을 들어 한자 한자 정성들여 메신저 주소를 적습니다.
아차차, 네이트 온이 아니라 MSN이면 어떻게 하지?
...
둘 다 적어드릴까?
앞에 ‘MSN’, ‘네이트’ 이렇게 구분해드릴까?
네이트도 ‘nate’ 영문으로 적는 게 더 나으려나?
이름 모를 다른 메신저면 어쩌지?
아무래도 한번 여쭤보는 게 낫겠지?
전광석화 같은 질문들이 머리 속을 지나간 후에
최대한 경망스럽지 않게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볍게 미소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메신저 종류를 물어보려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녀가 눈에 들어옵니다.
휘둥그레한 두 눈으로 곱게 찢어 서류가방위에 올려진 A4 용지와
제 손에 잡힌 볼펜 그리고 싱글벙글한 제 얼굴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서서히 미간이 찌푸려지며 얼굴이 굳어갑니다.
아, 왜 그러는지 제 마음까지 굳어갑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요.
그녀가 팔을 들어 왼편 손목을 천천히 내밉니다.
그리고는 오른손 검지를 왼편 손목에 가볍게 갖다 대며 말합니다.
“몇…신…지 아시…냐…구요…”
숨이 멎습니다.
아니, 세상이 정지된 느낌입니다.
순간, 앞에 있던 능글스러운 아저씨께서 바로 고개 내밀어 말씀하십니다.
“아가씨, 지금 8시 47분 막 지났습니다, 헤헤.”
순간, 모든 상황이 정리됩니다.
그녀는 제게 ‘메신저 하세요?’가 아니라
‘몇신지 아세요?’ 라고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입 안에서 굴려보니 비슷한 발음에 바보같이 잘못 알아들었던 거였습니다.
갑자기 제 모습이 스포츠 리플레이 장면처럼 생생히 재생됩니다.
시간을 물었던 아가씨를 옆에 두고,
좋다고 헤벌쭉 거리다가,
갑자기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고는,
보고서 서류 표지를 반듯하게 접어 곱게 찢고,
어디서 받은 지 모를 싸구려 볼펜 한 자루 들어,
웬 이메일 주소를 정성스레 써 내려가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지긋하게 바라보는,
왠 정신이 뭔가 이상해 보이는 한 아저씨가 보입니다.
아, 왼편 손목에 유난히 빛을 발하던
문자판으로 손목을 덮어버리는 싸구려 시계도 보이네요.
아무 말도 못하고 볼펜과 찢어낸 A4용지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습니다.
침도 못 삼키겠습니다. 다 들릴 것 같아서요.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웃음을 참느라 다들 아까보다 볼이 부푼 것 같습니다.
키득대는 소리도 조그맣게 나는 것 같습니다.
눈도 못 감겠습니다. 그렇다고 뜨고 있기도 뭐합니다.
그저 멍하니 초점을 흐려버립니다.
그냥, 이번 역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리자, 라고 생각합니다.
역에 들어서자 옆자리 아가씨가 일어납니다.
읽던 책 제대로 덮지도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페이지를 끼워 일어납니다.
허겁지겁. 누가봐도 뭔가를 피하는 듯한.
안되는데, 이렇게 오해로 인연이 끝나면 안되는데, 하며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내리는 모습을 쫓아갑니다.
아, 그런데 허겁지겁 내리는 그 모습까지도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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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냐...이후 최대 파장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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